azalea26일 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 문장에 반응하지 않는 십대도 있을까?
사춘기 소녀의, 라는 말을 썼다가 지웠다. 그 무엇도 나를 대변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사춘기에도, 소녀에도 나는 없다. 나는 다만 저 노래를 이해하고 싶은 무엇이었다.
이랑이라는 이름도 좋았고, 검은 배경과 얼굴뿐인 앨범 커버도 좋았고, 단정한 이랑의 얼굴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직관적인 제목이. 검은색과 맨얼굴은 그것들로써 이미 하나의 태도다. 나는 저 노래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저 안에 담긴 것만큼 진솔한 것은 더 없을 것이라고 앞질러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들리지 않아 내심 비참했다. 처음 뮤직비디오를 재생했을 때의 곤혹스러움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근본적인 의문은 이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거칠고 단조로운 것이 정말 누군가에게는 음악이 되는지. 그렇다면, 난감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 되어 버리는 거니까. 다 자란 것처럼 굴지만, 너는 이것들을 이해하기에 어설프다며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초대받고 싶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정말로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고, 가사에서 말하는 '밀쳐냄'의 감각만큼은 나도 잘 아는 것이라고 우기고 싶었으니까. 나는 그런 것들에 자존심이 상하는 아이였다. 분노와 외로움 앞에서만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 아이. 오직 그것들 앞에서만 당당할 수 있었다.
6분 57초가 언제나 나에게는 벽이었다. 이 노래가 와닿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조차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기적으로 벽을 넘길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십대가 다 지나도록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이 노래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 노래를 잊고 지냈다. 맞지 않는 노래 정도로 라벨링해 두고 더는 도전하듯 찾지 않았다. 동안에 이랑이 먼저 나에게 왔다. 나는 이랑과 만난지도 모르게 만났고, 초대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그 세계에 속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속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낯설던 노래들에게만 이해받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끝이 이랑이라는 것만 받아들일 뿐이다.
최근에 이 노래를 다시 들었다. 단 한차례도 애쓸 필요가 없었다. 6분 57초가 지나치게 매끄러웠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폭력적으로 귀에 꽂혔다.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네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듯이. 내가 인식하는 것보다 노래가 빨랐다. 귀에 꺼지지 않는 번역기가 달린 기분이었다. 조각 난 것처럼 느껴지던 그 가사들이 맥락을 가졌고, 실은 너무나도 선형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안쪽 깊숙한 곳이 긁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노래를 이해한다는 사실이 상처가 되었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는데 왜 기쁘지가 않을까.
이 모습을 선망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비로소 어린 내가 염원하던 나다. 나를 내다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내는 것이 전부인 내가 되어서. 나라는 존재를 나와 타협해야 하는 내가 된 채로. 잘된 걸까. 뭐 하나는 해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명확한 성장의 지표 앞에서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지우기 어렵다. 이렇게 자랐는데, 자라긴 자란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노래로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증명이 된다면.
안담의 소설 속 한 대목을 떠올린다.
너무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 희망이 되기도 하는지. 나도 내 몫의 응시를 가지게 되는지.
이 노래가 다소 그렇다.
어쨌거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