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jongha20042개월 전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주.
이 책은 내가 지금껏 읽어온 책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제목부터가 몹시 발칙한 이 책의 내용은 제목에 걸맞게 몹시 발칙한(positive) 상상력들의 총집합이다.
책의 줄거리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궁금하다면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거나 직접 돈을 지불하고 사서 읽어보길 바란다.
나만 당할 수 없다는 게 아니고,
이 책은 실제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거리를 아예 쓰지 않고 다짜고짜 돈 내고 읽어보라 하는 것은
마치 용산 전자상가의 용팔이들이 선량한 소비자들을 겁박하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것 같으므로
간단하게 줄거리를 설명해 보려 한다.
주인공은 두 명이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항문.
이렇게 보니 주인공은 한 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두 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어느 날 대통령이 모종의 사정으로 대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앉았다가, 똥이 나오지 않아 손가락으로 항문을 찌르자 항문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왜 항문이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느냐 하면 대통령이 항문에 사보타주를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단순히 그가 5개월 동안 대변을 보지 않아서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거기로 싸야 할 똥을 입으로 싸고 있으므로, 이것은 항문에 대한 직무유기이자 항문에 대한 중대한 사보타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각 부처 장관들과 관료들이 모두 소집되어 비상 회의가 열리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제 이 항문의 입을 닫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데...
일단 줄거리는 여기까지 하고,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간단한 감상을 적어보자면, 작가는 정말 미친 사람인 게 분명하다. 뒤편 작가의 말을 보면 어렸던 시절에 생각했던 소재들을 두고 스스로도 천재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들은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던 시절 하던 치기 어린 오만한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이것마저도 기만으로 느껴질 만큼 극도의 발칙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겠다.
정말 너무 끔찍하게 좋게도 이 책에는 해당 글 한편으로 완결되는 중편 소설이 아니다. 나도 사고 보니 알았는데, 단편소설집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단편이 아주 좋았다.
특히 좋았던 단편은 '202X 뽁뽁이 대량 학살사건에 대한 보고서'다. 이 책의 첫 단편인데 난 처음에 이 글도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주' 서문인 줄 알고 '대체 항문 이야기는 언제 나오는 거지?'라는 스스로도 하기 싫은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야 했다. 다행히 아예 다른 작품이었다는 걸 다시 목차로 돌아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항문에 대한 심도 있는 묘사가 들어간 작품이 총 두 편 나오는데 두 작품은 형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작가가 '대항사'(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주의 줄임말)를 새로 출간하는 기념으로, 후속 격인 작품을 만든 단편이 같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 후속편은 여전히 번뜩이는 상상력이긴 했는데, 어, 작가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솔직히 내용이 좀 더러웠다. 묘사를 너무 잘해서 책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평 같지만 극찬이다.
만약 책을 읽으며 다음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도 모자라 어떤 단어가 이어질지도 갈피를 못 잡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이 소설들은 너무 창의적이고 너무 재밌어서 읽으면 다른 책들이 밋밋하고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난 아무래도 글렀다. 이제 다른 책은 더 못 읽을 것 같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똥 이야기나 항문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다가 끝나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내용이 다른 내용에 비해 조금 많긴 하지만 그래도 선을 적절히 넘은 것 같다. 선을 지키진 않는다. 선을 넘는데, 딱 이 정도면 적당히 좋겠다 싶을 정도다.
글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절절히 느끼고 있다. 앞으로도 글을 쓰면서 글이 만만하게 느껴질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 같다. 즐기면서 글을 쓰는 것과 좋은 글을 쓰는 건 안타깝지만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지 않은 글을 즐기면서 썼다고 해서 그 행동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좋은 글을 쓰든 똥 같은 글을 쓰든 쓰면서 즐긴다면 그거면 된 거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좋은 글을 쓰는데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즐겁지 않다면... 아, 근데 그것도 쓰고 보니까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글쎄, 과연 그런 사람이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글에 만족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때 이 책을 쓴 작가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 같다. 전자 중에서도 즐기면서 좋은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 같다. 그래서 읽으면서 나도 글을 쓴다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아니면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순간이라면 이런 느낌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럴 것 같다. 내가 쓴 글을 아무도 안 읽어도 괜찮다. 좀 슬프긴 하겠지만. 혹평을 해주면 오히려 고맙다. 무평보단 나으니까. 다만 창작을 하면서 내가 즐겁고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