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악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악이라고 규정되어 억압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
선한 나의 모습은 그대로 둔 채, 그동안 악이라고 생각해 억눌렀던 면까지 나의 일부로 통합하는 것. 데미안이 보여주는 것도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데미안은 분명 기존의 기준에서 보면 ‘악’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 악은 범죄와 같은 악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 용기, 혁명, 불응과 같은 이미지에 가깝다. 기존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따라가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처럼 느껴진다.
모든 가치는 양면성을 지닌다. 예민함은 감각이 되고, 분노는 용기가 되며, 오만은 자신감이 된다. 충동은 결단이 되기도 한다. 어떤 성질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억압하는 순간 오히려 나에게서 분리된 ‘악’이 되는 것이다.
악이라며 억압하지 않고 온전하게 나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악은 더 이상 악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이 모든 답은 내면의 나를 모두 성숙하게 통합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나의 모습도 미워하거나 질타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답을 정해두는 순간부터 억압되어 악이 되는 내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감정은 가지면 안 된다.’
‘이런 모습은 나답지 않다.’
이렇게 나에 대한 답을 미리 정해놓으면 그 답에 들어맞지 않는 나의 일부가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며 억압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정말 100%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100% 알고 있는가?
내 안의 모든 것을 100% 끌어내고 있는가?
정답은 분명 나의 안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정답에 맞지 않는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나로 통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생각하다 보니 별의 커비가 떠올랐다. 커비는 적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을 때 적을 동료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을 자신의 안으로 흡수하여 그 능력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용한다. 적의 능력이 커비에게 들어온다고 해서 커비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습과 능력은 달라져도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존재는 여전히 커비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분노하는 나도 나이고, 질투하는 나도 나이고, 오만한 나도 나이고, 충동적인 나도 결국 나다. 그렇다면 그 모습을 잘라내어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안으로 가져와 다른 모습들과 융화시키는 것이다.
모습이 바뀌어도 나는 온전히 나이기에, 악의 모습 역시 나의 모습이다.
그 악의 모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 속에 융화시키고 통합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내가 싫어했던 나의 모습조차도 나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결국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습까지도 나라고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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